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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산행과 고산윤선도 유적 걷기◈산행이야기◈ 2017. 10. 17. 04:55
■해남 두륜산 산행
●산행일시:10/16 07:00~14:00
●산행거리및시간:11km,7시간
●산행코스:대흥사 주차장~유선관~대흥사~북미륵암~오심재~고계봉~오심재~흔들바위~노승봉~가련봉~만일재~두륜봉~진불암~표충사~대흥사~유선관~대흥사주차장 (원점회귀)
문재인 대통령께서 사법시험 준비를 하셨다는 해남 대흥사. 국내 최장이라고 이야기하는 두륜산 케이블카는 전무후무한 규제사항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등산배낭을 메고 케이블카를 탈 수 없다는 것...대흥사는 십승지 중의 한곳으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화마를 피해갔단다. 대흥사에서 바라다 보이는 와불은 참 신기하기만 하다. 고계봉은 대흥사와 고흥군의 알력 싸움인지는 모르지만 일반 등산객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고 등산로 또한 산죽이 가득하여 등산로로는 부적합하다. 케이블카를 타고 고계봉에 올라 오심재와 북미륵암을 경유하여 대흥사로 하산하는 코스도 있다.케이블카를 타면 저기 고계봉에 오를 수 있다. 고계봉에서 오심재와 북미륵암을 경유하여 대흥사로 하산 할 수 있다.
두륜산 대흥사
좌측부터...노승봉(부처님왼팔),가련봉(부처님오른팔),두륜봉(부처님머리),북미륵암(부처님심장)
침계루. 원교이광사 친필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31) 소론 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신지도(薪智島)로 이배(移配)되어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畫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畫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Daum백과]원교 이광사(1705~1777년)가 쓴 것으로 전해지는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1786~1856년) 때문에 불태워져 사라질 뻔 했다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8년 3개월(1840~1848년) 유배를 살았다. 유배지인 제주도로 가던 중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대흥사의 주지는 차의 선인이라 불리는 초의선사(1786~1866년),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을 본 그는 "글씨 꽤나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글씨라고 할 수 없는 저런 글씨를 걸었나 당장 불태워"라며 핀잔, 그 자리에서 글씨를 써서 주며 걸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9년 뒤, 유배가 풀려 돌아가던 김정희가 대흥사에 들러 지난날 자신이 떼라고 했던 현판이 아직 있는가 물었단다. 그러며 자신의 현판은 떼어내고 그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고 한다.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의 친필이다. 신라의 김생(金生)이래 우리나라에는 많은 서예가가 있었으나 김정희만큼 커다란 업적을 남긴 사람도 드물다. 조선 시대 말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나 서예가, 금석학자, 정치가, 실학자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1856년 경기도 과천에서 파란 많았던 일생을 마쳤다. 추사는 잉태된 지 24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리고 태어날 때는 용봉산의 초목이 시들고 우물물이 줄어들어 추사가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추사는 어렸을 때부터 글씨에 뛰어났다. 그는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가서 용방강·완원 등의 대학자들을 만나 금석학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되었다. 그는 구양순·미불·동기창 같은 명필들의 필법과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이루었다.[Daum백과]
보물 제320호인 대흥사 응진당 삼층석탑. 높이 430cm. 응진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부는 4매의 돌로 짠 지대석 위에 하대석과 중석을 붙여서 4매의 긴 돌로 하층기단을 형성했는데, 중석의 각 면에는 2개의 탱주와 4개의 우주를 모각했다.갑석은 1장의 돌로 경사진 윗면 중앙에 호형과 각형의 상층기단
굄을 나타냈다. 상층기단 중석도 4매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탱주와 우주를 1개씩 모각했다. 그 위의 갑석은 판석으로 밑에는 부연이 있고, 위에는 각형 2단의 굄이 있다. 탑신부 각 층의 옥신과 옥개는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각 층마다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4단 받침의 옥개석 위에는 2단의 각형 옥신 굄이 있다. 낙수면의 경사는 보통이고 2층 옥신은 높이가 줄어든 데 비해 폭은 그다지 줄지 않았다.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仰華)·보륜 등으로 되어 있다. 복발은 일반적인 편구형(扁球形)이고 앙화는 8각형의 꽃송이를 세우고 작은 화형을 배치해 횡대를 돌린 특이한 형식이다. 기단의 탱주와 옥개석 받침의 수가 줄어드는 등 부분적으로 간략화되었으나 기단 갑석의 몰딩 수법이나 옥개석 윗면의 2단 탑신받침 등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규모가 작지만 결구(結構) 수법이 단정하고, 조각수법이 세련되고 정교해 신라 하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흥사 북미륵암석탑과 함께 신라 하대에 석탑양식이 우리나라의 서남단지방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려주는 작품으로 주목된다. 1967년 1월 해체·수리 때 상층기단 내부의 자연 판석 위에서 동조여래좌상(銅造如來坐像) 1구가 발견되었다.[Daum백과]500년 사셨다고...
원교 이광사의 친필 편액인 천불전. 천불전은 보물 1807호이고 조선시대인 1811년(순조 11)에 화재로 불탔으나 2년 뒤인 1813년에 초의선사의 스승인 완호(玩虎)대사와 제성(濟醒)대사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천불전에는 1817년에 조성된 천불상(千佛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천불상은 경주에서 조성되어 해남 대흥사로 옮기기 위해 1817년 11월, 2척의 배에 실렸으나 1척이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돌아와 1818년 8월 15일 천불전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雙峰寺)의 화원승(畵員僧)으로 대흥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했던 풍계현정(楓溪賢正)이 기록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1821년)에 기록되어 있어, 천불전의 중건과 천불 조성 및 봉안의 역사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다.[Daum백과]
천불千佛을 모신 천불전.
북미륵암 해우소.
국보 308호가 있는 북미륵암 용화전.
보물 제301호. 높이 4m.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두륜산 정상 부근에 있는 대흥사 북미륵암에 세워진 탑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받침돌 위에 아래 받침돌과 가운뎃돌을 같은 돌로 마련하여 4장의 긴 돌로 짰다.기단의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층이 높아질수록 체감되며, 몸돌에는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지붕받침은 1·2층은 4단이나 3층은 3단으로 줄어들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머리장식받침)과 앙화(솟은 연꽃 모양의 장식)가 남아 있다. 양식이 부분적으로 간략화되었으나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조성 연대는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57번지 대흥사에 있다.[Daum백과]
북미륵암의 처사님.국보 제308호. 높이 4.2m. 앙련과 복련이 마주하여 잇대어진 연화좌(蓮花座)에 결가부좌한 본존은 두광과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삼중(三重)의 원으로, 두광과 신광의 밖에는 화염문(火焰文)을 선각으로 새겼으며, 그 안에 4구의 비천상을 위·아래에 대칭으로 배치시킨 것이 특징이다. 하단의 비천상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른 한쪽 다리를 꿇은 자세이고 얼굴은 본존을 향하여 있다. 한 손은 무릎 위에 얹고 다른 한 손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으며 연화좌에 앉아 있다. 상체는 고려시대 보살상에 크게 유행했던 착의법인 천의 자락을 어깨에서 겨드랑이로 돌려 가슴 앞에서 묶어 내리는 보살 옷을 입었다. 하체는 상의(裳衣: 치마)를 입었다. 등 뒤로 천의 자락이 휘날리고 있어서 하강하는 비천상인 것을 알 수 있다. 본존은 머리가 소발(素髮)인데 알맞은 크기의 육계가 뚜렷하다. 넓적한 직사각형의 얼굴은 근엄하고 풍만한 편이다. 좁은 이마에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있으며, 두 눈은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여기에 적당한 크기의 코, 작고 두꺼운 입에, 귀는 길어 어깨에 닿았다. 비만한 목은 짧아 삼도(三道)가 가슴에 표시되었다.어깨에는 두꺼운 통견의(通肩衣)를 걸쳤다. 옷 주름 선은 굵은 띠 주름의 평행단상밀집무늬[平行段狀密集衣文]로, 양팔과 다리 등에 부자연스럽게 나타나 있다. 이때의 굵은 띠 주름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 계단식의 옷 주름 무늬가 퇴화한 듯하다. 평판적으로 처리된 가슴에도 주름이 잡힌 승각기[내의(內衣)]가 보인다. 왼쪽 어깨의 띠 매듭에는 가사를 묶는 띠가 달려 있으며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팔꿈치에 닿아 있다. 이 가사 띠는 승려 초상화에 흔히 표현되는데, 불상의 경우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경주 남산 용장사 장륙미륵존상 등 몇 예가 있지만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손 모양은 왼손은 오른 발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오른 무릎 위에 얹은 모습으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유사하다. 또한 두 팔이 허리와 붙어서 잘록한 허리의 굴곡이 묘사되어 있지 않아서 둔중한 느낌을 준다.[Daum백과]
오심재에서 올려다 본 고계봉.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저기 전망대에 오를 수 있고 이곳 고계봉도 다녀 갈 수 있다. 두륜산 케이블카의 특이한 점은 배낭을 메면 케이블카를 탈 수 없다.
이곳 뒤로 등산로는 뚜렷한데 키보다 크기에 조금 힘들다.
이렇게 철조망으로 막아 놨는데...
노승봉과 가련봉...
흔들바위. 동석動石→부동석不動石...전혀 움직이질 않는다...그래서 부동석.
예전엔 저 밧줄을 잡고 올랐다. 일명 통천문...
노승봉 뒤로 케이블카 승차장과 전망대 그리고 고계봉이 보인다.
천하의 명당이라 이야기 하는 대흥사.
가련봉과 두륜봉 그리고 송신탑이 있는 도솔봉.
완도 고금도 방향. 멀리 고금대교가 보인다.
고계봉과 두륜산 케이블카 전망대.
가을이 이렇게 물들어 있다.
가련봉...
예전의 등산로도...
과남풀...
예전엔 이렇게 릿지도 해야 했다.
만일재에 내려서 오르면 구름다리와 두륜봉에 오를 수 있다.
비둘기 한 마리...
억새도 내년을 기약하고...
향이 진한 산부추...
부처님 머리에 해당하는 두륜봉.
구름다리,백운대,코끼리 바위라고도 불리우고...
두륜봉에 다녀와서 진불암으로...
두륜봉 정상에서 본 가련봉과 노승봉 그리고 고계봉..
이렇게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거북이.
도솔봉
진불암경내
구절초
천년 동안 이어져 오는 불심길...
정조대왕의 친필 편액인 표충사 어서각(임금이 있는 곳). 사찰 대흥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는 유교식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일본군 격퇴에 앞장섰던 서산대사 휴정을 받드는 사액 사당으로 1669년(헌종 10) 대사의 제자 천묵이 사찰 대흥사 경내에 세웠다.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와 처영대사의 진영이 함께 봉안되어 있다. "절에 스님의 사당을 별도로 마련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경상남도 밀양의 표충사에도 사찰 경내에 유교식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표충사를 둘러싼 돌담 안쪽 중앙에 북향으로 사당이 있고 그 좌측과 우측에는 조사전(祖師殿)과 표충비각(表忠碑閣)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표충사 외곽에 있는 의중당(義重堂)과 강례재(講禮齋) 주위에 담을 두르고 솟을삼문인 예재문과 호국문을 세웠다.정조 임금은 1778년에 서산대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표충사(表忠祠)’라는 표충사 현판을 써서 내려주었으며, 세금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주었다. 나라에서는 매년 예관과 헌관을 보내 관급으로 제향하도록 했다[Daum백과]
표충사 서산대사 화상(왼쪽부터 처영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
초의대선사
경내에서 바라 본 와불
해탈문에서 본 와불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대둔사(大芚寺)라고도 한다. 창건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라말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13명의 대종사(大宗師)와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명찰로 임진왜란 뒤에야 비로소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갖추었다.[Daum백과]초의탑 뒤로 보물 제1347호인 서산대사(휴정) 부토탑이 있다.
유선관은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한옥으로, 원래는 대흥사를 찾는 신도나 수도승들의 객사로 사용했다고 하나 40여 년 전부터는 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5000원인 아메리카노.
고산 윤선도의 사당이 있는 녹우당.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휴관일이다.
녹우당 앞을 지키고 있는 500살 되신 은행나무.
해남 윤씨의 시조인 어초은漁樵隱 윤호정의묘.
담쟁이 단풍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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